(1) 세종대왕
 
세종 임금은 서기 1397년 5월 15일 (태조 6년 음력 4월 10일) 한성부 준수방(지금의 서울 통인동 137번지
일대로 여겨짐: 경복궁 서쪽 영추문 맞은편))에서 조선 3대 임금인 태종(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휘(이름)는 도, 자는 원정이다.

세종 임금은 1418년 8월 10일(음력) 아버지 태종의 내선을 받아 조선 제 4대 임금에 올랐다. 천성이 어질고
부지런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취미와 재능이 여러 방면에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정사를 펼침에 있어 국민
을 사랑하고, 국민의 어려운 생활에 깊은 관심을 가져, 국민을 근본으로 한 왕도 정치를 베풀었다.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고 많은 인재를 길렀다. 특히 우리 겨레 문화를 높이는 데 기본이 된, 찬란한 문화
유산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또한 주자소를 설치하고 인쇄활자(독일 구텐베르그가 1455년에 개발한 인쇄
활자보다 앞선 것임)를 개량하여 인쇄술의 발달을 꾀 하였으며, 측우기, 해시계 등을 발명 제작함으로써
농업과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고, 군사적으로 북쪽에 사군과 육진을, 남쪽에는 삼포를 두어 국방을 튼튼히
하였으며, 의술과 음악, 방대한 편찬 사업, 법과 제도의 정비, 수많은 업적으로 나라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세종대왕은 1450년(세종 31년) 4월 8일 승하하였으며,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영릉에 안장되어있다. 사적 제195 호이다.


(2) 훈민정음 창제 동기와 목적

훈민정음'이라는 위대한 문화적 창조의 동기와 목적에 관하여는 '훈민정음' 가운데서 세종대왕이몸소 말씀
하였다.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국지어음 이호중국 여문자불상유통)

故愚民 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 多矣 (고우민 유소욕언 이종부득신기정자다의)

予 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여위차민연 신제이십팔자 욕사인인이습 편어일용이)


(우리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아니한다.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가엽게 생각하여 새로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쉬이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훈민정음 머리글 풀이")

이 말씀이 지극히 간단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속에 우리가 알고자 하는 바가 다 들어 있음을 알겠다. 곧,
① 우리 나라에는 독특한 배달말이 있으니, 이 말을 적어 내기에 알맞은 글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에 알려진 모든 다른 나라가 각각 제 나라 말에 알맞은 글자가 있는데, 우리 나라만은 글자가 없어,
남의 나라의 글자, 한문을 빌려 쓰니, 이는 안타까운 일이다.

② 남의 글자 한문은 우리말과 서로 통하지 않는 글자일 뿐더러, 본디 어렵기 짝이 없는 글자이기 때문에, 우리
배달 겨레에게는 이중으로 어려워, 백성들이 다 배워 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하늘이 내린 성인이
로되, 한학에 정통하는 데는 많은 노력과 세월을 허비하였을 것이니, 시간과 경제의 여유가 없는 일반 대중이
야 얼마나 그것이 어려운 일인가 함을 아프게 느낀 것으로 보인다.

③ 일반 서민이 글자를 깨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 뜻을 펴지 못한다 함이다. 곧
아랫사람의 뜻이 위에 사무치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에게 억울한 일이 많아 정치가 명랑하지 못하니, 어진정치
의 이상에 위반함이라고 생각함이다. 정인지의 꼬리글에서도 이를 "죄를 다스리는 이는 그 곡절의 통하기 어려
움을 괴로워 하고 있다....<중간 생략>.... 이로서 송사를 들으면 그 속사정을 알 수 있다(治獄者病其曲折之難
通, ……以是聽訟, 可以得其情: 치옥자병기곡절지난통........이시청송, 가이득기정)" 이라고 하였다.

④ 이 새 글은 상하 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쉽게 익혀서 일상 생활에 편리하게 쓰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라
하였다. 곧 민중 문화의 보급과 생활의 향상을 꾀함에 그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위에 든 이유 밖에, 또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원인을 들 수 있지 아니할까 생각된다.

① 고려 오백 년간에 끊임없이 다른 겨레들로 더불어 겨루는 살림을 하여 오다가, 끝장에는 몽골에게 큰 곤욕
을 당하기까지 하였으니, 겨레 의식이 눈뜨게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며,

② 원 나라, 명 나라의 갈음에 즈음하여, 왕조를 세운 조선 왕실에서는 저절로 자아 의식이 생기게 되었으며,

③ 세종대왕이 동북으로 `육진'을 개척하고, 서북으로 `사군'을 차려 놓고, 남쪽 백성들을 옮겨 심었으니, 자아
충실의 필요감이 강렬하게 되었으며,으면 그 속사정을 알 수 있다)

④ 세종대왕이 전제, 세제를 개혁하여, 백성과 나라의 부강을 꾀하였으니, 경제적 및 사회적 발전에는 백성들
의 지식의 보급이 앞서는 조건이 됨을 실감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사회적 원인에서, 만인을 뛰어넘는 밝은 지혜와 통찰력을 가진 세종대왕은 제 겨레 특유의 말씨
에 알맞고, 만백성이 깨치기 쉬운 민중의 글자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할 만하다.
(옮긴이 주: 한자의 음은 옮긴이가 써넣은 것임)

(3) 만든 때와 반포한 때

세종실록'에 의하면, 그 창제는 세종 25년(1443년) 계해 12월이요, 그 반포는 그보다 3년 뒤인 28년(1446
년) 병인 9월이다. 곧 `세종실록'(권 102) 25년(1443년) 계해 12월 졸가리에,

是月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于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訓民正音


(이달에 임금이 몸소 언문 스물 여덟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는 고전을 모방하였고, 첫소리 · 가운뎃소리 · 끝
소리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룬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우리 말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되었지마는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이른다.)

이라고 하고, 또 정인지의 꼬리글(옮긴이 주: 정인지의 해례 서문이라고도 함) 가운데에,

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계해년(1443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스물여덟 자를 처음으로 만드시어..)

라 하였으니, 그 창제의 때를 알겠으며, 같은 책(권 113) 28년(1446년) 병인 9월 졸가리에,

是月訓民正音成 御製曰 國之語音異乎中國 ......
(이 달에 훈민정음이 다 되었다. 임금께서 글을 지어 말씀하기를, 우리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

라 하여, `훈민정음' 전문을 적어 놓았으니, 이로써 그 완성하고 반포한 때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이,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의 때를 적되 날짜는 밝히지 아니하였음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
이다. 그 창제의 날은 꼭 적기 어렵다 하더라도, 그 반포의 날은 분명한 것이었을 터인데, 이를 밝혀 적지 아니
하였기 때문에, 오백 년 뒤 우리들로 하여금 쓸데없는 모색과 시비를 하게 하였다. 그러나 상고한 바에 따르면
그 해의 9월이 작은 달이었으므로, 위에 적은 `훈민정음' 반포의 기사는 음 9월 29일로 미루어 볼 수 있다.
그래서 조선어 연구회(1908년 창립, 1931년에 조선어 학회로, 1949년에 다시 한글 학회로 개칭함)에서는
음력 9월29일(양력 10월 29일)로써, `훈민정음' 반포 기념일, 곧 한글날(처음에는 `가갸날')로 정하고 이를
해마다 기념하게 되었으니, 이는 한글 반포 제8주갑인 병인년(1926)에 비롯된 일이다.

(4) 창제의 경과


실록에는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및 반포에 관한 극히 간단한 기사 만이 있을 뿐이다. 이렇듯 완미한 과학적
짜임을 가진 글자가 하루 아침에 되었을 리가 만무하니, 필연코 오랜 동안을 두고 고심 연구한 결과로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고심 연구의 경과에 관한 기록이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다만, 이 문화적 대발명을 반대한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의 상소문 가운데에,

且今情州椒水之幸 特慮年斂 扈從諸事 務從簡約 比之前日 十減八九 至於啓達公務 亦委政府 若夫諺文
非國家緩急不得已及期之事 何獨於行在 而汲汲爲之 以煩聖躬調攝之時乎


(또 이번 청주 초수(초정)에 거둥하시는데도 특히 연사(농사가 되어 가는 형편)가 흉년인 것을 염려하시어
호종(왕가를 모시고 따르던 일)하는 모든 일을 힘써 간략하게 하셨으므로, 이를 전일에 비교하오면 10의 8,
9는 줄어들었습니다. 계품하는 공무까지도 또한 의정부에 맡겼는데, 저 언문 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부득이
하게 기한에 마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행재소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성궁을 조섭하시는 때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 세종실록 제 103 권 세종 26년 음력 2월 20일조-)

라 한 것은, 위대한 창작에 지성을 다하신 성덕의 한 끝을 보여 주는 재료가 된다. 곧 세종이 한글의 창제에
밤낮으로 애썼기 때문에 안질이 나서, 이를 치료하기 위하여, 청주 초정에 거동하실새, 특히 연사가 나쁜 것을
염려하사, 시종이며 모든 절차를 열에 아홉은 덜고, 정무까지도 다 정부에 맏겨 버리게 되었는데, `훈민정음'
의 연구 발명의 일만은 요양을 위주하는 행재소에까지 가지고 가서, 쉬지 않고 그 연구에 골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한 지성을 다하신 공으로 말미암아, `훈민정음'이 25년 계해 겨울에 다 되었으니, 오늘날 우리로서 상상
하게 한다면, 그 때의 조야 민심은 이를 크게 반기고 기뻐하여, 세종대왕의 성덕의 가이없음을 우러러 기리어
마지아니하였을 것 같지마는, 사실은 이와 반대로, 곧 반대의 의논이 크게 일어났으니, 그 반포 시행에 이르기
까지 여러 가지의 파란 곡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 <한글재단> http://www.hangu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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